[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30대 초반에는 도저히 읽히지 않았던 책이 40대가 되니 너무 재미있게 읽혔다는 것! 그 이후 하루키의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가 ‘그’가 어떤사람인지 궁금하던 차에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출간 되었다
하루키의 책을 처음 산 건 2000년이었다. [상실의 시대].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워낙 베셀이라 한번 읽어보려 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70여쪽까지 읽고 도저히 못 읽겠다 싶어서 책갈피를 꽂은채 책꽂이에 곱게 꽂아 두었었다. 그러다 12년이 지난 2012년 너무 심심해서 책꽂이를 무심히 보다가 이사할 때마다 숙제처럼 딸려왔던 그 책을 뽑아 다시 읽었다.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런 내용으로 소설이 되지? 신기하고 놀랍고, 심지어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었다. 더 재미있었던건 ‘나의 변화’였다. 30대 초반에는 도저히 읽히지 않았던 책이 40대가 되니 너무 재미있게 읽혔다는 것! 그 이후 하루키의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가 ‘그’가 어떤사람인지 궁금하던 차에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출간 되었다.
역시, 신기한 사람이었다. 외야석 잔디에 느긋이 누워 야구를 보다가 날아오는 공을 보고 맥락도 근거도 없이 든 생각,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로 그날 밤부터 가게 주방 식탁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단다. 영어 epiphany,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의미처럼 자신은 그 일을 경계로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도 그처럼 극적이지는 않아도 몇 번의 크다면 큰 변화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안 읽혔던 소설 [상실의 시대]가 재미있게 읽히고 그로인해 소설이 좋아진 것 처럼.
하루키는 전업작가가 되면서 부터 달리기를 시작해 삼십 년을 넘게 거의 매일 한 시간 정도 달리기나 수영을 생활습관 처럼 해왔다고 한다. 소설가는 자신과 늘 독대해야하므로 체력이 필수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그의 일관적인 성실함이 작품속에 녹아져 독자들도 자연스레 좋아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단순히 체력을 위해서 달렸을 뿐인데 어느 연구기사에 뇌 내에서 태어나는 해마 뉴런의 수는 유산소 운동을 통해 배약적으로 증가한다는 내용을 봤다고 한다. 나라면 얼마나 기뻤을까! 몸이 좀 안 좋아 달리고 싶지 않은 날에도 ‘아무튼’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달렸을뿐인데 자신에게 그렇게 도움이 되고 있었을 줄이야! 내가 그동안 잘 하고 있었구나싶은 그 벅찬 뿌듯함이 공감돼서 더 인간적이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혹한의 아침이나 혹서의 한 낮에 몸이 나른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 ‘자, 힘을 내서 오늘도 달려보자’라고 자신에게 따스하게 격려한다는 내용은 내 마음에도 따뜻한 위로가 되었고 흉내도 내고 싶었다.
‘나는 소설을 쓴다는 행위 자체를 좋아합니다.’ 그는 소설을 쓰고 그것만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참 감사한 일이고, 실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단다. 그것은 마치 유전이나 금광 같아서 만일 발굴되지 않았다면 깊고 깊은 땅속에 잠들어 있었을 거라며, 마찬가지로 누구나 발굴의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개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발굴한 글쓰기는 행운이고 그것은 무료입장권 같은 것이기에 입장했다고 끝이 아니라 그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 지 혹은 버릴 지, 장애물들은 어떻게 뛰어넘을지 등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재능이나 기량의 문제이며 세계관의 문제이고 심플하게는 신체력의 문제이니 자신의 타입을 찾아 ‘만전을 기하라’고 조언한다. 인생은 정말이지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는 글을 쓰며 즐겁기로 마음 먹었고 -실제로 즐거워했을테고- 그 마음또한 성실히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건 잘 알려져있다시피 그의 성실함과 우직함이다. 본인은 말한다. 머리가 별로 좋지 않아 ‘둔해빠진’ 작업을 하고 있다고.
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글을 써 본 적이 없는 그는 영어를 번역하면서, 혹은 제한 된 자신의 영어실력으로 글을 쓰면서 자신의 문체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끊임없이 쓰고 또 쓰고 계속 쓰고…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을 생각했었는데 이 책에서 하루키는 자신의 깊은 내적 혼돈과 마주하라고 조언한다. 자신의 내적혼돈을 마주하고 싶다면 입 꾹 다물고 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혼자 내려가면 된다고, 우리가 직면해야하고 정면으로 마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참된 혼돈은 바로 거기에 깊숙히 잠재해 있다고. 작가이건 아니건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의식 밑바닥을 마주볼 수 있어야겠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나의 깊은 무의식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루키는 자신의 보이는 면, 일종의 물에 떠 있는 빙산을 친절히 설명하고 얘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야기하지 않은 물에 잠겨있는 거대한 빙산의 그를 느끼게 되어 감히 경의를 표한다. 번역도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