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의 순기능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상태가 인생전반에 큰 영향을 준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아들러는 인간의 가능성과 능동성에 초점을 두었다. 결핍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근거가 그것이다. 나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여러 부분 결핍이 있었다. 특히 부모님은 내가 도저히 어떻게 메꿀 수 없는 결핍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시절부터 좋은 엄마가 되고자 마음 먹었다. 그 첫 번째 기준은 아이의 입장에서 어떤 엄마가 좋은 엄마일까이다.
‘엄마’ 혹은 좋은 어른에 대해 지식이 없었을 무렵인 사춘기 즈음부터 육아, 유아교육, 어린이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읽었던 기억나는 책은 샘터사에서 나온 [유아교육신서], [딥스], [한아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등이다. 특히 소설들을 읽으면서 아이들이 기댈만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결혼을 하고 얼마 안돼서 첫 아이가 생겼지만 유산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1년이 지난 뒤 지금의 큰아이를 갖게 되었다. 나는 태교부터 신경을 썼다. 원래 음악을 좋아하기도 해서 하루 종일 클래식 라디오를 들었다. 임신과 육아 책도 꼼꼼히 읽고 산책도 챙겼다. 평소에 비린 것을 싫어해 생선은 거의 손도 안 댔었는데, 등푸른 생선이 아이에게 좋다고하니 일주일에 한 토막이상은 먹으려고 애썼다. 잘 먹지 않던 우유도 매일 500밀리씩 마셨다. 과일이나 채소 등 아이를 위해 골고루 먹으려고 엄청 노력했다. 역시 책으로 배운 라마즈 호흡법으로 아이를 순산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또 다른 육체적 힘듦이었다. 잠이 부족해 매일매일 너무 피곤했다. 하루쯤, 아니 단 삼십 분도 누구에게 아이를 맡기고 쉴 수 없었다. 그렇게 피곤하고 힘든데도 신기한 것은 짜증이 나지 않았다. 아이가 기어 다닐 즈음에는 집을 엄청 깨끗하게 청소했다. 어딜 기어가더라도, 무엇을 입에 넣더라도 괜찮을 수 있도록 신경 썼다. 이유식을 비롯해 아이가 먹을 것도 신경 써서 준비했다. 모든 엄마들이 비슷할 것이다.
나는 어부바를 좋아한다. 아이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업어주고 안아줬다. 내가 업어주고 싶어도 못 업어줄 때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에 업을 수 있을 때 한껏 업어주고 싶었다. 내 등에 업혀 머리를 기대고 있는 아이에 대한 나의 느낌도 참 좋았다. 업힌 채로 잠이 들며 혹시 내려놓다 단잠에서 깰까 봐 그대로 쪼그려 엎드려 있기도 했다. 열이 나거나 아플 때는 책에서 얻은 지식과 의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며 낫기를 기다렸다. 아이는 고맙게도 아프고 나면 쑥쑥 컸다. 더 고마운 것은 떼를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쓸 만도 한데, 지금은 사줄 수 없다고 설명을 하면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엄마인 나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무슨 말이든 잘 들어주려고 애썼다. 어른 입장에서 쓸데없는 말도 필요없는 말도 때로는 귀찮은 말도 되도록 잘 들어주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도 내 말을 잘 들어주었던 것 같다. 세 살 무렵부터는 유모차에 태우고 문화센터 같은 곳에 가서 놀아주었다. 요즘은 키즈클럽 같은 곳에 가지만 그때는 그런 시설이 없었다. 도서관에도 자주 갔다. 다행히 어린이 방이 따로 있어서 책도 보고 친구도 사귀고 했던 것 같다.
둘째 아이는 원래 두 살 정도 터울로 낳고 싶었다. 하지만 큰아이가 두 살 때 국제금융위기로 남편의 월급이 반토막 나는 바람에 미뤄야 했다. 나이 차이는 4살 정도 나지만 학년은 3개 학년 차이가 나게 하고 싶었다. 큰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둘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라면 같은 청소년이라고 생각들지만 초등학교 6학년이라면 많이 어리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러니 학교를 일찍 보내야 하고 그러려면 1,2월에 낳아야 했다. 그러려면 4, 5월에 가져야 한다. 그래서 6개월 정도 전부터 배란일을 표시해 두기 시작했다. 또 그 전해 12월에는 미리 보약도 챙겨 먹어두었다. 큰 아이도 아직 어려서 운동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체력도 안 되었다. 이젠 가져야겠다 싶었을 무렵부터 최선의 몸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감사하게도 4월에 아기가 생겨 다음 해 1월에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도 태교부터 신경을 썼다. 늘 그렇듯 하루 종일 클래식 라이오를 듣고 먹을 것에 신경을 썼다. 큰 아이에게도 소홀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때 제일 잘한 일은 큰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준 것이다. 매일, 그만 읽어도 된다고 할 때까지 평균 예닐곱 권은 읽고 또 읽어 주었다. 특히 좋아하는 책은 뜯어 먹은 듯이 모서리가 닿고 나달거릴 정도였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큰 아이에게 동생을 잘 돌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큰 애가 안아달라고 하면 둘째 아이를 내려놓고 안아 주었다. 그러면 아가는 금세 빽~하고 운다. 그러면 큰 애가 동생을 안아 주라고 한다. 난 큰 애 들으라고 “얘는 왜 이렇게 못 기다리고 우는 거야~ 형아 안아주지도 못하게~” 그러면 큰 애가 아가라 그러는 거라고 오히려 나를 이해시켰다. 그때 내 생각은 갓난아기니까 엄마만 눈에 보이면 좀 덜 안아줘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동생이 생겨 사랑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이 있을 큰 아이에게 집중했다. 큰 아이는 내 기대와 생각 이상으로 동생을 이뻐하고 챙긴다. 어느날 문득 궁금해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싸운 일이 있는지. 둘 다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기억에 없다고 했다. 부모입장에서 형제가 싸우지 않고 커 준 것이 더없이 고맙다.
대학을 간 이후는 비로소 부모를 떠났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정말이지 자신들의 삶이다. 고단함도 즐거움도 아픔도 기쁨도 그들이 지어가는 것이다. 물론 중간중간 힘이 되어주기도 위로가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완벽한 부모, 엄마는 없다. 나도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키웠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답답하거나 싫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나는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합의를 봤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상태가 인생전반에 큰 영향을 준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아들러는 인간의 가능성과 능동성에 초점을 두었다. 결핍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근거가 그것이다. 나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때로는 절망하고 우울하다. 그럼에도 이왕 태어난 거 열심히, 때로는 천천히 채워가며 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