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요즘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내용도 흥미로웠고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특히 현실감있는 내용이 전세계인들에게 공감을 받은 것 같다.

요즘 일본과의 갈등속에 나라 안팎이 불안하다. 일본은 강제징용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했으면서도 유독 우리나라 대법원의 판결에 딴지를 거는 것은 물론 보란듯이 무역보복의 수순을 밟고 있다. 일반국민에서 시작된 불매운동과 더불어 분노에 치를 떠는 국민들의 인터뷰가 뉴스에 매일 등장한다.
심지어 애꿎은 우리나라 소상인들의 일본음식점들이 곤혹을 치르고 있다. 우리나라 재료로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세금을 내며 하는 장사인데도 눈치를 봐야하고 손님들에게 미안해하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고있다. 일식을 좋아하는데 전처럼 즐겨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임진왜란으로 우리는 일본의 침략을 경험했다. 그들은 신식무기로 우리를 위협했고 우리는 거의 맨몸으로 견디다시피했다. 그로인해 국토는 황폐화 되었고 정치인인 위정자들은 도망하기 바빴으며 민초들은 배곯기를 밥 먹듯이 했었다. 이순신의 장계에는 누가 어떻게 싸웠고 누가 어떻게 전사했는지가 씌여있었다. 그렇게 민초들의 목숨값으로 우리나라가 연명되었다.

그리고 구한말, 일본은 또다시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했다. 대륙을 향한 욕망을 위해 우리나라를 밟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스란히 당하며 또 견뎌야만 했다. 그 와중에 살기위해, 또는 개인의 영화를 위해 일본편에 선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중에는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일본에 사람을 보내 천황에게 용서를 구하자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안중근의사는 일본인 판사가 목숨을 구명할 방법을 알려주자 오히려 교수형보다 더한 형은 없느냐고 반문했다는데 말이다.

그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당시 일본의 아소다로 일본총무상은 “운이 좋게도, 정말 운이 좋게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했단다. 그는 현재 일본의 부총리겸 재무상이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은 전쟁특수를 누려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패전이후 경제 대공황을 겪어야 했던 일본경제에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회생의 기회였다. 그의 외조부인 요시다 시게루 전 일본총리는 “한국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니, 한국전쟁의 수혜자는 일본이 틀림없다. 그렇게 쌓은 부의 극히 일부가 한일협정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 돈에 대해 산케이신문 노설위원인 구로다 가쓰히로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3억불이라는 그 금액이 지금 한국 발전의 기초가 됐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돈의 흐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한다. 더우기, 차관이나 협정 등으로 들어온 돈들이 일본 전범기업들의 배를 불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일협정에 개인청구권의 소멸은 없다. 그래서 우리 대법원이 일본기업에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렸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개인이 일한 돈을 기업에서 지불해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나라가 무슨 권리로 개인의 노동의 댓가를 기업에게 안 주어도 된다고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경제보복, 무역보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럴때,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물밑 접촉을 시도해야한다는 사람들도 있다고하는 보도를 들었다.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정부를 압박해 왔다는 보도와 함께 참으로 상충되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8월2일 일본은 또다시 압박카드를 들이밀었다. 백색국가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다른 아시아국가들과 다르게 특혜를 누려왔고 안보상의 문제가 있으니 제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적당한 이유도, 합리적인 방법도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국제정세도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더욱 압박하고 있다. 미중의 무역전쟁이 환율전쟁과 함께 안보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좀 어렵고 힘들더라도 이번만큼은 일본에 무릎 꿇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과 인간으로서의 존엄, 국가로서의 독립성을 지켰으면 좋겠다.

영화 [기생충]에서 박사장과 아내 연교는 어찌보면 순진하고 좋은 사람들이지만 기택네와 같은 사람들과는 분명한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들이 그 선을 넘은 것을 엄격하고도 냉정하게 관리하며 넘었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끊어낸다. 그러면서 기택에게 있는 최소한의 자존의 선은 거침없이 넘는다. 그 결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똑똑한 사람이, 자신에게 선이 있다면 상대에게도 선이 있을 거라는 걸 왜 몰랐을까. 선이라는 것은 자신들에게만 있을 것이라는 반푼이 같은 생각안에 갖혀 있었던 것이었을까?

중국은 사회주의국가이지만 경제에 관한한 어떠한 자유국가보다 분명한 개념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자유주의 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지만 어떠한 공산주의 못지않은 견고한 1당을 유지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른 건 그렇다치고, 일본이 더이상 우리나라에 대해 선을 넘지 않기를 엄중히 바란다.
이번 문제는 힘의 논리도 경제의 논리도 아닌 정의의 논리가 기준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TV 뉴스들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