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아이에게 도움을 줄 때 지켜야 할 기준
십대의 아이들은 자신들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너희 때를 우리도 겪어봐서 잘 안다고 하면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한다고 화를 낸다. 어른의 입장에서 빤히 보이는 과정과 결과지만 십대 입장에서는 부모가 옳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부모들이 견지해야 할 요령이 있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기분이 좋아 들떠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만으로 가득하다. 모순되고 예측하기 힘든 행동을 한다.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이상적이고 관대하면서도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고 타산적이다. 상반된 양극단을 왔다갔다하면서 비정상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부모들은 그 시기를 지나왔음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해도 별 소용이 없는 말들을 한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십대 아이들은 자신들도 왜 그런지에 대해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중간시기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겪는 기복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들은 그들의 들뜬 기분은 너그럽게 보아주고, 고독을 존중하며 불만을 받아들여 주는 것이 아이를 도와주는 것이다. 부모의 논리로 옳고 그름을 따져주지 않는 것이 크게 돕는 길이다.
십대의 아이들은 자신들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너희 때를 우리도 겪어봐서 잘 안다고 하면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한다고 화를 낸다. 어른의 입장에서 빤히 보이는 과정과 결과지만 십대 입장에서는 부모가 옳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부모들이 견지해야 할 요령이 있다.
관용과 허락, 받아들임과 찬성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대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들이 머리를 지저분하게 기르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그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억지로 자르게 할 수는 없다. 기꺼이 허락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얼굴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인상을 쓰고 거친 말을 한다면 아이는 또 다른 것으로 아버지를 기분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럴 때 아버지는 아들의 선택은 존중하되 자신의 감정도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얘, 네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네 선택이지만 그 머리를 보면 내가 밥맛이 없어진다. 밥은 각자 먹도록 하자.” 그러면 아들은 적지 않게 당황을 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에 따른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것이다.
부모들은 가끔 아이들에 대한 동질감의 표시로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쓰거나 아이들처럼 입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은 부모들은 부모들다운 모습이기를 기대한다.
부모들의 눈에는 아이의 단점이 너무 잘 보여 일러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순간 대화가 중단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받아드리고 싶지도 않고, 수정하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때때로 부모들은 자녀의 잘못이나 실수를 고쳐주려고 애쓴다. 아이들도 자신의 방법이 틀렸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적대감을 갖는다. 직설적 독설로는 아이들에게 존중하는 태도를 가르칠 수 없을뿐더러 상처를 주는 흉기가 될 수 있다. 동정심이 없는 진리는 사람을 깨뜨리고 씁쓸함과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럴 때 부모는 당면한 위기를 잘 극복하도록 조용히 도와주고 자신의 잠재력에 따라 살려는 마음을 갖도록 조심스럽게 돕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부모의 눈에는 십대라도 아직 어린아이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자녀가 얼마나 예뻤는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십대 아이들의 자신들의 어린 시절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어른 대접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대 아이들에게 칭찬, 비판, 보상, 규율 등을 적용할 때는 어린 성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현명한 부모는 십대 자녀에게 자신은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차츰 만들어 간다. 아이 스스로 자신의 일을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그래’라는 말과 함께 관심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면 아이들은 부모에 대한 적대감 대신 의논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사춘기 아이들은 얽매려고 하면 할수록 적대감을 보인다.
부모들은 친밀함의 의미로 아이들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간섭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반항한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행복하려면 부모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함께 서 있되, 지나치게 가깝게 서 있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십대 자녀를 다른 한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결론적으로 부모와 자식이라도 서로 상대의 소유가 아니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소유이다.
요즘 ‘꼰대’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판별 언어로 ‘나 때는’을 쓰냐 안 쓰냐이다. 아이들은 이 말을 듣는 즉시 귀를 닫는다. 아이들 눈에는 지금 보이는 부모의 모습이 다이지, 자신만 했을 때의 부모는 상상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아이들을 돕고자 한다면 부모 스스로 어른스러워져야 한다. 아이들의 말에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거나 아이의 두려움과 분노, 혼란스러운 기분에 동화되기보다 든든한 조력자로서 아이들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씨앗은 어떤 싹이 나올지 예측이 된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클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아이들의 재능이나 기질, 성향으로 쉽게 예측의 말을 한다. “너는 시인이 될 거 같아”, “너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좋은사람이야”,“너는 끈기가 없어” 이렇게 아이들에게 꼬리표를 달면 아이들은 버거워하면서도 부모들이 정해준 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 꼬리표를 달아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가 어떤 모임에 가려고 허락을 구하는 경우 이중 메시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친구 집에서 모여 하루를 보내려고 할 때 허락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러라고 하면서도 “네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엄마는 잠을 못 잘 거야.” 그러면 아이는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기도 하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게 되기도 하고 따돌림을 당해 외로움과 괴로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부모가 미리 그런 상황들을 얘기해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그런 위기가 발생하면 잘 극복하려고 노력하여 자기 삶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야 하는데, 그것은 부드러운 경고도 충고도 아니다. 믿음을 가지고 서서 기다리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과 존중이라는 바탕이 있다면 그 위에서 아이들은 충분히 견뎌내고 성장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엄마 아빠는 나에게 강요를 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말없이 서서 기다려 주었어. 두 팔을 활짝 펴고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객을 기다리는 항구처럼……” *
참고문헌, [부모와 십대 사이] /양철북/ 하임 G. 기너트/신흥민 옮김 *52쪽